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899)
사람노릇은 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 '마포안식일교회' 수석집사이신 김O희 집사님의 따님인 이효O성도가 직장 근무중 쓰러져 고대안암병원 중환자실에 의식이 없이 누워있는지 보름이 되었다. 내가 다치기 며칠 전에. 나이가 많은 나는 그만해 다행인데 대학 일학년과 중학 일학년인 남매가 있는데 일어나 엄마노릇도 해야 하고 친정엄마도 아직 가정을 책임지고 있고, 환자가 여섯살에 남매가 새 가정에서 자랐으니 우리집과 비슷한 경우라 더 관심이 간다. 그래 같은 교인으로 무얼 도울 수도 없고 해서 오늘 아침 퇴근해 알리지 않고 오는 길에 톡으로 오늘 기관지 수술한다고 집사님이 병원가는길이라고 해 병원에서 만나고 수술들어 가는거 보고 나왔다. 잘되어 의식을 찾기를 바라고. 아들과 환자 시어머니께서 오신 것도 뵙고. 병원을 나와 1968~1973. 2월..
아프지말고 살아야. (둘) 그렇게 여기저기 다니며 단골 한의원에서 침도 맞아 보고 하다 한 달이 지난 9월부터 동네에서 합기도장을 운영하는 내 또래 분에게 내 목치료를 맡기기로 하고 아침에 우리 집에 와서 30분 침을 놓고 30분 지압으로 치료를 시작했다. 한 달 여가 지난 추석 무렵 치료 전보다 더 아프고 잘 자는 내가 잠을 설칠 정도가 되자 아내에게 나 너무 아프니 그만하고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겠다 했는데 아내가 하는 말, 이왕 시작을 했으니 좀 더 받아 보고 결정을 하자 해서 그대로 치료를 받았다. 처음 시작을 할 때 그 양반이 한약을 같이 복용하면 효과가 배가된다고 했지만 치료비 하루 만원도 당시 우리 형편에 적은 액수가 아니라 한약은 생ㄱ각도 못했다. 가게를 해서 겨우 먹고살다 내가 운신을 못해 그나마 가게도 아내 혼자..
오늘, 안식일. 지난주 금요일, 10.4일에 우리 마포교회 화단 전지중에 넘어져 다친 지 오늘 9일째이자  그 뒤 처음 참석하는 안식일이다. 2주에 한번 참석이라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家長이라 근무를 해야 급여를 받아 생활을 하니 하나님께서도 용서를 하시리라 여기고 있다.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한의원에서 침과 뜸과 부황치료를 받아  분주한데 그래도 회복을 위해 한의원 두 군데하고 정형외과, 세 군데를 번갈아 다니고 있다. 어서 나아야 나도 좋고 직장에서도 근무에 지장이 없어질 테니. 오늘은 아침 퇴근 후에 홍제천을 돌아 보고 교회롤 갈 예정이다. 연희동 집에서 생활할 때는 2015전 躁鬱症으로 새벽에 일찍 깨면 時도 없이 나가 걸었는데 담배를 끊은 그 해부터 증세가 가라앉은 후에는 며칠에 ..
처음 반나절 휴가. 아마도 올해 처음일거다. 근무지를 여러군데 옮기다 지난 6월부터 삼성동 근무를 시작해 일년 미만이라 여름 휴가도 못받고 책임자가 여름 지나 하루 휴가를 주겠다고 그런걸 오늘 다친 후 두번째 평일 근무라 쓰고 있다. 지난 번 월요일 오전에 병원들러 오후 근무를 했는데 근무가 너무 힘들어 끙끙앓아도 옆에 앉은 동료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래 오늘 휴가를 쓰겠다고 하고 오전에 정형외과 물리치료받고 종로나가 이발도 하고 짐맡긴 현대(백)에 돌아 왔다. 점심을 먹어야겠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아 망설이고 식품부 한쪽에 앉아 일기를 쓴다. 가장이 무언지 이러고 살지만 남들에게 빌리러 다니지 않으려니 어쩔 수 없고 한편으로 이삼십대에 연세많으신 부모님 밥먹고 허송세월한게 너무 죄송하고 눈물이 난다. 꼭닮은 우리 아들이 ..
사람이 싫다. 꼭 30년전 차가운 철판의자 위에서 몇 달을 잔 결과로 그 무더웠던 1994. 8. 10일 무렵 아침에 일어나다 몸이 말을 안듣고 일어나 지지않아 이십여분을 뒤척이다 간신히 일어 난 날 오후 부터 고개가 앞으로 45°정도가 꺽여 꼭 4개월을 고생하고 추운 12.1부터 다시 가게에 나갈 수가 있었다. 다행히 수술을 받지 않고. 한달은 여기 저기 다니다 보내고 그뒤 침과 지압으로 삼개월 치료를 받고. 이번에 알았지만 당시에 완쾌가 아니었다고. 그리고 그 때 하도 아픈 내게 짜증을 내어 결혼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꽃화분을 밖에서 방문안으로 던져 문앞에 흠을 내고 그집에서 나올 때까지 흔적을 봐야 했었다. 오늘 연희동 자림한의원에서 침과 부황을 뜨고 신촌수제비 한그릇 먹고 마을버스타고 집으로 가서 집앞에 반찬..
가을 참, 좋다. 사고 6일째,근무를 하고 있다. 밖에 나가니 햇볕도 좋고 기온도 조금 덥기는 하지만 연중 최고다. 22층 옥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잠실 한강과 높은 타워의 조합도 좋고 옥상 조그만 꽃밭의 작은 가을꽃도 이쁘기만 하고 늘 자리를 지키는 무역회관의 모양도 멋지고. 아파트 앞 인도에 잠깐 앉아 든 생각, 언제 이렇게 서울 중심거리에 한가하게 앉아 급여를 받아 보겠나 하면서 웬만하면 오래 버티고 열심히 근무하자고 마음을 먹었다.이 좋은 계절에 여름이 끝나기 전부터 우리 주상복합앞 9호선 봉은사역  3번 출구 '올리브영봉은사역점' 맞은편 인도에 팻말을 걸고 많은 여인들이 영업을 하고 있다. '정O성명학연구원' , 내가 궁금한 것은 지금 이 시절에 성명학연구원도 그렇고 또 종사자들이 저렇게 많은 것도 그렇다. 검색을..
생각을 줄여야. 사고 후 오일째 아침에는 상도동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점심먹고 한 수 하고 일어나 팔이 아파 절절매고 집을 나서 독립문 세란병원에 가서 사고날 찍은 X레이 필름을 CD로 받아 가지고 아내가 가자는 여의도 카톨릭성모의원으로 가는 지하철이다. 서울이 만원인 것은 이미 1960년대 부터지만 요즘은 더한 이유가 평균수명의 놀라운 연장때문에 더하다. 출근시간부터 노인분들(나보다 더 잡순분들)이 타시고 한낮에는 더 많다. 세란병원 갈 때 지하철 경로석에 목보호대를 하고 앉아 가는데 앞으로 타는 노인분들, 평소에는 얼른 일어 났지만 오늘은 그냥 앉아 있는데 바늘방석이었다. 요며칠 목보호대를 하고 일반석 앞에 서도 아무도 일어 나는 사람이 없고 물론 바라지도 않지만 불편한건 사실이다. 년초부터 오십견으로 고생을 하고 ..
아프지 말고 살아야. (하나) 지난 4일 금요일, 조금 다쳤어도 불편한건 많이 다친거나 진배없고 일상이 무너져 힘이 드는데 우리 마나님 이래라 저래라 갑짜기 머리가 나빠졌다는둥 지청구에 더 아프다. 꼭 30년 전 1994년에 부천시 괴안동에서 한여름 장사를 다하고 며칠 후부터 휴가를 가기로 해놓고 아침에 일어 나려는데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 그때도 혼자 이십여분을 애를 쓰고 간신히 일어 났다. 그리고 그날 오후부터 고개가 아래로 꺾여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사정이 있어 집에서 자지를 못하고 장사가 끝나면 집에가 저녁을 먹고 다시 가게로 가서 철판으로 만든 의자위 비닐장판 한장 덮힌데에서 요도 깔지 않고 얇은 이불만 덮고 자기를 사개월을 한 결과였다. 그해 1994 여름더위는 지금도 여름더위 순위 꼭대기에 있을 정도다. 남대문 도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