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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안식일 오늘은 우리 제칠일예수재림교 안식일인데 아침 퇴근을 해서 근무지에서 가까운 효창운동장도 볼겸 효창공원앞역 지상 꽃밭에서 나홀로 온라인예배를 드리고 효창운동장앞까지 올라가 겉만 구경을하고 내려와 이제 고척동 내 방으로 가는전동차 안이다. 교회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올해초 은퇴하고 일년을 더 연장한 김인상 목사의 다른교회에서 올리는 은퇴예배 참석을 위해 일요일 아침에 교회에 가서 그날 운전을 맡은 본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에게 몰상식한 봉변을 당하고 나왔는데 사태파악도 제대로 못한 목사, 수석장로, 여집사등등에게 출석정지를 당해 그뒤로 교회예배를 중단했다. 그리고 지난달 다시 나가려고 했더니 사과는 커녕 담임목사에게 못할 말을 하는 교인은 잘 되는걸 본적이 없다는 여성수석집사의 말에 아, 이 사람들은 예수..
대책없는 늘근 사내. 8월에 부당해고를 시킨(그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아파트에서 지노위에 보낸 해명서를 보고 그에 대한 답변서를 작성하며 그 치졸함에 화가 치미는걸 누구에게 얘기라도 해서 풀수 없어 혼자 열이 올라 점심무렵 연남동경의선숲길 햇볕 좋은 벤치에 앉아 참치캔에 한잔을 마시고 점심무렵부터 아내 기다리다 다섯시가 되었고 합정에 오라는거 가지 않고 신촌수제비 한그릇에 또 소주한잔을, 길청소하는 분 김밥한줄 건네고 짧은 시간이고 낮에 전주도 있고 취해서 어여 고척동으로 들어가 쉰다고 지하철을 타고 신도림에서 1호선 갈아 타야 하는걸 노약자석에 잠이 들어 깨니 종합운동장이었고 그냥 돌아 가자고 다시 잠들었다 깨니 강남역. 그짓을 반복하다 결국 밤 열한시쯤에서야 인천가는 1호선을 타고 개봉역에 내려 보니 열두시 전인데 마을..
나는 누구인가. 1954. 음 5.15 태어난 나는당시에도 서울이었는지 경기도 시흥군 신길리였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주소가 영등포구 신길동 147번지였다. 그래 내 본적이 되었는데 1960년도 우신국교입학 당시에는 해군본부 뒤 철조망으로 담을 두른 바로 아래 동네에 유일하게 우리집만 마당은 넓고 방세개 기역자 초가집이었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 이사를 했던 1968 중학교 3학년 이른봄까지 살면서 조금 창피하기도 했지만 국교 일학년 음 시월에 엄마가 病으로 돌아 가시기까지 아버지 혼자 미아리 하월곡동 종이공장 기관장으로 지금의 나처럼 격일제 근무하시면서 집안에 국수틀을 놓고 국수를 뽑아 대나무에 널어 말려 나무도마에 썰어 팔았던 기억도 있고 그래 나중에도 동네에서 국수집으로 불렸던 기억도 나는데 내 띠동갑 큰딸이 아니었으면..
하루를 못넘기고. 지난 9.15 부임하신 우리 여성 관리소장님은 에기서 뿌리를 뽑겠다는 생각인 모양입니다 하고 그 다음날 근무교대하던 기전과장이 얘기를 했었던 생각이 나는데 그 여인이나 나나 나이 때문에 한 결심이겠지요 했었다.그 뒤로 하루 하루 조금씩 본색을 드러내다 추석연휴전 어떻게 떡값 한 푼 없느냐, 규정이 육개월이고 액수는 적지않다 그게 무슨 소용이냐 했지만 그러고 연휴 전날 퇴근을 했다 가방만 가지고.그리고 연휴 첫날 내가 근무하는데 오후 한시지나 들어온 소장이 나가면서 왔다고 얘기해ㅡ 밖으로 나가는걸 보니 이마트가방이 빵빵하게 들고 나오며 자기 차를 운전해 와봤다고 하고 나가는걸 보았지. 그거이 어디서 받은 선물이었다면 罰받을 짓을 한거고.다음날 출근한 과장이 소장이 뭘 주지 않더냐 누가 우리 여덟명분 선물세..
그래, 세상사 順理대로. 나는 비교적 시력과기억력과 길눈이 좋은 편이었다. 그 좋은 시력과 기억력으로 학교공부를 했어도 잘 했을텐데 국민학교까지는 기억력과 시력으로 상위권 유지를 했다. 그래 일차로 입학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고 서울 영등포 신길동 우리 동네에서 제일 좋은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중학교가 마포 아현동의 경기공고와 같이 있던 경서중학교였지. 그런데 중학교에서도 공부를 안해 경기공고를 가라고 담임이 권한걸 배신하고 오년제 경기공전으로 바뀐데 가지못하고 서울공고로 가게 되었다. 거기도 바로 합격을 했지만 아버지께서 원하시던 1지망 기계과는 안되고 내가 원한 지망 건축과로 가서 역시 공부를 안하고 간신히 졸업을 했다. 그게 1972년이었는데 그렇게 태어나서 국교,중학교,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공부를 '일'도 안하고도 ..
비내리는 추석날. 늦더위에 시달리다 양력 이달 초에 기온이 조금 내려가 엄마 喪은 조금 시원하게 치르고 그 뒤로 다시 덥더니 세상에 칠십넘게 살아도 추석에 비가 오다니 심술궂은 하늘이 밉다. 아침에 교대하고 나와 고척홈밖에 갈데가 없어 엄마 돌아가신 신길성애병원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서 신길역 내려 내가 태어난 옛날집이 생각나 1968 마당넓은, 동네 한채였던 초가집자리에 지은 두채 집앞으로 가서 한참을 보고 1973 다시 이사해 살던 집자리로 가서 해군본부 유휴지와 합해 더샾 아파트가 된데 언덕 경계석에 앉아 한잔하고 도림동 친구네 찾아 가는 길에 모교인 우신초교도 한참을 둘러 보고 친구네 집자리는 찾지도 못해 그냥 고척홈으로 오다 마을버스에 가방하나 놓고 내린걸 바로 알아채 떠나는 버스 세워 찾아 고척으로 가서 한잠하고..
빨간날의 기억. 방재실에 앉아 벽에 걸린 9월 달력을 보니 24~27일까지 추석연휴인데 휴일개념을 사용해본게 언제인가. 군대생활 끝난 1979를 지나 1980 교교동창소개로 동대문구 신설동 당시 동대문구청앞 설계사무소 근무를 하는동안 주6일제라 사용해본 후에는 기억이 없다. 그전에도 거의 없고 그뒤 장가를 간 1987까지는 이일 저일을 조금씩 이어갔고 장가를 가고도 일년을 지내다 역곡 남부 조공아파트 콘크리트 옹벽아래 자리를 잡고 열댓군데중 한곳 노점장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명절이면 조금 더 팔기위해 전날늦게까지 장사를 하고 당일부터 며칠을 쉬었지. 그리고 장사를 놓고 이 일을 시작한 2002월드컵 열린 해부터 지금까지 격일제 근무를 해서 '도' 아니면 '모'로 근무를 쉬거나 하거나중 하나여서 차례를 지낸 2010까지 어..
그래, 주어지는대로 매사 불만투성이 늘근 꼰대를 유일하게 바로 살라고 하는 내 아내나마 있어 지금 이렇게라도 살고 있는걸 알고는 있지만 막상 화나는 일이 있으면 본인이 통제가 안돼니 어렵다. 화를 내 주위를 시끄럽게 하고는 바로 후회를 하는 일이 반복이 되고 본인도 창피해 얼굴을 들 수가 없다.내가 특별하게 남보다 화가 나고 눈에 거슬리는 일을 많이 당할 확율이 없구만 어째 참지를 못하고 주윗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나 말이다. 나이나 적으면 젊어 그렇다지만 칠십도 지나 세살인데 지나친거 맞지. 사계절, 명절중 제일 좋은 추석이 낼모레인데 그만 조용하게 지내고 그 다음에 얘기나 하고 싶은 표현을 하도록 하자. 엄마가 돌아 가신지 추석날이라야 열여드레가 지난다. 아직 상중이고 상주인데.그리고 나보다 더 여유가 없는 분들도 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