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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야 한다지만. 지금 근무지에 2024.6.1부터 근무를 시작해 이제 8개월이 지나고 9개월째 접어 들어 5.30일까지 근무를 하면 4년 만에 퇴직금과 연차수당을 받게 된다. 그 목적으로 처음 근무할 때부터 동료 둘에게 갖은 무시와 텃세를 받고도 견디었다. 그런데 나를 뽑은 실장도 지난 1월에 갑자기 그만두고 새 실장이 1.13 일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동종업계 경력자도 아니고 일반직종 정퇴를 해 아침 잠깐 조회를 할 때 서당훈장같은 썰을 말씀하신다. 그러려니 하다 오늘은 업무를 가지고 내게 여기 근무가 한참인데 아직 그것도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해서 결국 목소리가 커지고 그 정도 기본은 알고 있다고 하니 어디서 책상을 하며 쳐다 보길래 이러지 마슈 나도 그런 대우 받을 사람아니요. 그렇게 끝을 내고 대기실로 내려 왔다..
휴일 근무. 우리 24시간 격일 근무자들은 주5일 근무자들처럼 휴일도 없고 일년 열두달을 하루같이 하루 24시간 근무 다음날 24시간 비번이 이어진다. 애초 5공화국이 시작되고 소위 용역회사 허가를 내줄 때에는 경비용역이나 시설관리용역 격일 근무자들에게 24시간 근무를 하면 48시간 휴무를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시설이나 공동주택의 관리비가 늘어나기 시작, 그걸 줄이기 위해 우선 손대기 쉬운 인건비부터 줄이게 되어 24시간 근무 24시간 비번이 되었고 그 후에는 관리인원을 줄이기 시작을 해서 내가 이 분야 일을 시작한 2002, 그리고 시설관리시작을 한 2010년에 비해 지금은 인원이 거의 반으로 줄었다. 그러다 보니 주민들은 사람줄이기 전의 서비스를 원하고 우리 입장에서는 어렵고, 그래 젊은직원들이..
설날을 보내고. 또 한번의 설날이 가고 여기 근무지의 일상이 시작되는 날, 생활문화지원실 직원이라야 실장포함 열한명 중 기전담당이 세명이고 둘은 맞교대 한명은 주오일 근무다. 주간근무자는 6일을 쉬고 오늘 출근을 해 설날 포함 사흘을 근무한 내게 수고했다는 한마디 없이 실장이 출근을 하니 '복많이 받으세요' 소리를 크게 인사를 하고 내가 설날아침 십여분을 일찍 나와 교대자를 들어 가라고 해도 수고하라는 한마디 없이 들어 가는거 보고 내성적인 사람들 할 수없다고 그랬다. 그말을 듣자마자 그게 아니고 그양반이 박주임을 싫어해 그런다고 하는거다. 아니 내가 작년 유월 일일 처음 왔을때 부터 뭐 한가지 제대로 설명해준거도 없이 나를 싫어 하는 이유가 뭐냐, 청소부터 기본으로 해야 하는 일 한가지 하지않고 내가 다 하는데 기가 ..
그래도 명절은. 아주 어렸던 때와 고교시절 전까지는 명절이 기다려젔다. 열댓가구 집성촌이라 집안 모두 모여 제일 윗조상분이 계셨던 집부터 차례차례 차례를 지내고 첫집에서 떡국이나 토란국에 밥과 제주를 마시고 그 다음집으로 다니며 차례를 지내고 우리집은 가까운 사촌이나 육촌이 없었어도 나는 그 북적대는 분위기가 좋았었다. 물론 혼자 한달여 전부터 그 모든 준비를 하셨던 엄마는 힘이 몇배로 드셨지만.그래 우리 형제는 세뱃돈을 줄 분들도 없어 받지도 못했어도 그냥 좋았었다. 그렇게 이십대에 접어 들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군복무 마치고 늦장가 가고 차례도 내가 모시게 되고 부터 고통이 시작되어 명절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우리 풍습중 년중 두번의 명절이 참 좋은 풍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직업상 격일 근무..
세상과의 소통 내가 살아온 과정에 정상적인 나이에 직장생활을 했거나 아니면 목공이나 일반건축일이나 기계나 전기를 다루거나 운전을 하거나 아니면 직원을 데리고 사무실을 운영해본 적이 없이 살아 대인관계가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벌어 먹는 시설관리, 처음에는 일반건물에서 시작을 했어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서는 공동주택, 주로 아파트에서 근무를 한다. 알고 지내는 사람이 많지 않고 모든 이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지도 못해 소통의 부재를 이어 가서 2012에 블로그와 트위터를 시작하고 2015에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카카오스토리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스레이드까지 게시를 하고 있다. SNS역시 성격대로 꾸미거나 하는걸 안해 공감이나 친구도 적은 편이고 다음 블로그가 티스토리로 바뀐 후에는 친구도 공감..
나도 나이에 맞는 삶을 살고 싶다. 나의 인생이 지금 이렇게 힘들어 진 것은 일곱살 1960에 국민학교를 들어 가서 열세살이 된 1966.2 에 졸업할 때까지 당시에도 소위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거세어 그 시절 우리동네의 셋방에 살던 아이들도 과외공부를 했지만 우리집 형편도 넉넉지 않은데다 나의 단순기억력이 좋아 과외도 안해보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고 전기에 무난히 들어 갔지만 중학교 3년 동안도 공부를 하지않아 동계인 경기공전을 포기하고 그 다음인 서공고 건축과로 진학을 했다. 건축도면이나 목공작업 두가지 모두 상위였지만 공부는 역시 안하고 도면그리는건 손이 느리고 그렇게 2학년을 마치고 3학년이 되어서는 과장선생을 엄마가 찾아 뵙고서야 영등포 구청옆 설계사무소에 실습을 나갔다. 지금의 영등포 로타리, 여의도로 들어가는 고가도로 철거하는 ..
집성촌의 가족사. 1954 내가 태어나고 자라 삼십이 넘어까지 살았던 내 고향 영등포구 신길동 147번지 영신초교 부근 동네에는 우리 陰城박가 열서너 가구가 함께 살던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꼭 한집이 남아 있고 당숙모와 둘째 아들 내외가 아들도 장가 보내 내보내고 살고 있고.오늘 내 고향을 돌아 보게된 것은 이제 몇분 안계신 우리 윗대 분들중 한분이신 집안 당숙모께서 어제 저녁을 넘기기 힘들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바로 조금 전 운명을 하셨다고 해 지나간 나의 어린시절을 돌아 보게 되었다.195,60년대 신길동 가마골(강씨와 박씨가 많아, 또는 항아리를 굽는 가마가 있어서)에는 논과 밭이 남아 있던 한적한 동네였다. 그리고 열서너 가구 박가네 집안이 모여 살았다. 그중 세집은 넉넉하게 잘 살았고 우리집을 포함 나어지 집안은..
마음먹기 나름이라지. 내 개인일로 마음이 아파 食口에게도 친구들에게도 知人들에게도 좋지않은 기운을 전하니 이래서는 않될 일인줄은 알면서도 내 감정 내가 조절을 못한다. 원체 감정조절을 못하는데다 일터에서 마음이 편하질 않아 더하다. 기본으로 생각하면 벌어 먹을 수 있음에도 감사해야 하지만 사람이 막상 그런가 말이다. 알량한 자존심도 버리지를 못하고 최소한의 대우를 바라니 동료나 친구나 지인들 보기에 별난 꼴통이겠지. 엊그제 친구에게도 얘기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먼저 뭘 바라거나 불편하게 하지를 않는데 부당한 대함을 참지 못할 뿐, 아마도 그들도 그렇게 생각할거라고 하더라. ㅎㅎㅎ.정신차려 늘근 꼰대!며칠만에 아내를 만나러 간다. 올해로 결혼을 한지 38년이 되는데 그 동안 우리 부부는 무얼로 살아 오고 살아 남았는가. 꿈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