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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말아야지. 바로 어제 흩어진 가족을 다시 모아 보자고 결심을 하고 아내에게도 동의를 구하고 내 형제들과 친구들, 그리고 집안 동생들과 생질조카 둘에게도 응원과 협조를 구했다.그리고 만천하에 공개도 했지.그랬는데 바로 오늘 조금 전에 오후 늦게까지 서방이 보낸 톡도 안보고 전화도 안받다 겨우 통화를 한 첫마디가 자기가 칫과치료받고 살림하고 얼마나 바쁜데 지난사진 또 보내고 수십번을 보내고 전화한다고 뭐라고 해서 나도 오만정이 떨어져 알았다고 끊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뭘하는거냐고 내게 물었디니 주책이지 뭐냐는 답을 들었다. 그래 맞다. 친구든이나 누이들에게나 지인들에게 보내는 내 창작물이 다 부질없고 소용없는 일이지. 그러나 나의 유일한 돈안드는 취미라 이어 갔을 뿐이다.늘근사내 딱하다.-2025.4.10 봉은사 ..
이제 제 자리로. 1954生이 1987.7.3에서야 장가를 가서 1987.11.30 새벽에 낳은 아들이 올해 서른아홉이 되었다. 요즘 만나이로 하면 아직 스물일곱이다.처음 만나 얼마 후에 둘이 결혼하기로 결정을 하고 바로 애를 가져서 그렇게 되었으니 실수로 생겨 억지로 결혼을 한게 아니었지만 조금 부끄럽기는 하다. 아내는 오늘 일기를 보면 쌍심지를 돋을테지. 당시에 돌아 가신 장모님께서는 뒤늦게 딸친구를 통해서 아이가진걸 알고 나신후에 믿고 있던 큰딸이라 실망을 하셨겠지만 오남매를 낳아 키운분이 그해 9월까지도 아이가진걸 모르시고 봉천동 친정에 다니러간 딸에게 옥상에 올라가는 심부름을 시켜 결국은 딸친구에게 부탁해 장모님께 얘기를 하고서야 아시게 되었다. 그렇게 친구들보다 늦게 겨우 하나 낳아 기른 아들과 父子사이가 벌어..
과거 훑기.
이제 좀 바꿔보자. 1987, 그해 大選이 삼김의 자기욕심으로 전두환에 이은 군출신 노태우에게 大權이 넘어 가고 말았다. 그해가 내게는 人生의 제일 큰 변화가 있던 해였고 지금도 그해의 네 자리 숫자는 나의 가장 뚜렷한 기억이다.1987년 7월 3일 서른넷의 나이로 서른하나 처녀를 아내로 맞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 전의 무위도식을 끝내고 먹고 살기 위해 기를 쓰고 살고 있고.아마도 그해 겨울이었을테지 대통령선거 투표일이. 내 생각에는 삼김이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나선 후 답이 뻔히 보였는데 당사자들은 그걸 몰랐을까, 아니다 그들도 그 좋은 머리로 알고도 나맜겠지만 서로 양보가 싫었을거다. 당시 호남이 고향이었던 동창부인이 그날 저녁 한 얘기, 아무래도 김대중이 안될거 같아 노태우를 찍었다고. 아마도 영호남이 서로..
나는 오늘 좋은 날.
부끄러운 날 대통령선거날 투표를 했던 나도 제대로 뽑지를 못하고 또 한번의 후회를 하고 말았다.물론 당시에는 문통의 잘못으로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만 이제 와 누가 누구를 탓하고 누가 누구를 파면하라 목소리를 높이겠는가. 모든 유권자들의 그릇된 판단의 결과물인 것을. 그래 놓고는 마치 한 인간의 잘못만인듯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모리배들이 역겹고 비겁하게 보인다. 그리고 한쪽은 자기들의 세상이라도 온듯 설쳐대는 꼬라지들 하고는. 언제나 그랬듯이 당장 후임이라도 된듯 옆에 붙어 칼춤을 추는데 한번 배반의 길을 갔던 물건들은 두번 세번도 갈 수 있음을 잊고 옆자리를 주고 받는다. 내 눈에는 보이는, 탄핵을 당한 바보의 옆에 있던 무리들 보다 한 수 위의 패들을 못보는 작은눈이 한심하다. 그 작은 눈이 인간의 기본도리도 저버..
안식일 출근. 오늘 우리 안식일,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일요예배를 드리는 일반교회 교인들이 우리를 이단이라 하는 아마도 가장 큰 이유겠지만 과연 그들이 우리를 이단이라 칭할 자격이 있는가 묻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태동한 교파들이 여럿 있는데 오랜 역사와 외국의 교단본부와 교인이 있는 우리를 포함하고 자기들 교회출입을 금지하는 교단에 우리를 같이 넣는데 그들이 그럴 자격도 없고 우리가 거기에 끼일 까닭이 없다는 얘기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서대문로타리부근 천막에서 최자실집사가 시작한걸 알고 내가 중학생일때 실제 보고 다녔다. 아마도 그즈음에는 이단이라 하고 밀어 내기 바빴었지. 그러나 그뒤 교인들이 불어나고 재정이 커져 여의도에 땅을사 교당을 번듯하게 짓고 일요예배를 서울 전역에서 대형버스를 타고 모여 ..
갑자기 온 봄, 그리고 산불. 지난겨울 큰 추위 없이 지나가더니 봄이 오는 길목에서, 해마다 산불이 있기는 했어도 올해같이 이렇게 넓게 이렇게 오래 타고 사람도 많이 생명을 잃은 적은 없었다. 그분들 연세도 많고 평생을 태어날 때부터나 스무 살 전후 시집을 와서부터 자식 낳고 농사와 함께 살아온 분들이라 더 안타깝고 애틋하다. 뉴스화면으로 봐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당사자분들은 어떻겠는가 말도 나오지를 않는다. 나는 서울 변두리지만 토박이고 지금까지 늦은 결혼 후 딱 10년을 경기 부천 역곡에서 살다 오고는 서울살이를 해서 경상 전라 농촌에서 사시는 분들의 애로를 겉만 보고 보이는 것만 겨우 알뿐이다. 내가 졸업한 서공고에는 1969년 당시에도 지방에서 공부 좀 하고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되는 집 아이들이 들어와 학과 공부와 실습도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