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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詩想

ㅇ연작詩想; 함께 살아보기(서른 여덟 번째)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느낌
- 박 지운 -



1982년 우리 아버지께서 돌아 가신 그 해
장인 어른께서도 유명을 달리 하셨는데 이북에서

내려오신
그분께서는 북에서 이미 결혼을 해서 삼형제를 두신 가장이었고
마흔이 넘은 장인 어른께 처녀 시집을 가신 우리 장모님(5년전 작고)은
일본에서 오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해방후 열살이 되어서야
부모님을 따라 귀국을 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장모님의 목소리가 약간

이상함을 느끼던차에
그 얘기를 듣고서야 비로서 이해가 되었습니다.
처 외할아버지, 즉 장모님의 아버지께서 귀국후 일본에서
벌어 오신 재산을 화투로 탕진을 하고 어렵게 사시던중에 장인어른께서
인물 고운 장모님을 식구로 달라하니 이십여세 차이나는

홀아비나 마찬가지인 분에게 식구 줄이듯

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물론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가 있지 않았을까,

아님 그 이뻤다는 맏딸을 어떻게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나는 분에게 주셨을까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두 분 모두 최선의 선택이 되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장인 어른께서는 당신 자신의 외로움과 두고온
자식생각에 새로운 가정이 필요 하셨고 장모님께서는
여자로서 녹ㄴ치않으신 성격인데 또래에게 시집을 가셨으면 어느 신랑이 

걸 받아 주고 살았을까, 아니 봐도 본듯하지요. ㅎ.
그렇게 만나서 딸처럼 아끼고 사시면서

급한 성질도 받아 주고 가르쳐
(한학공부를 많이 하셨다고함)가면서 오남매를

두셨는데 맏아들인 큰처남 (저하고 동갑인데 지난 해 환갑을 같이

하자더니 2월에 먼저 갔음) 둘쨰로 울 마눌, 처제, 끝으로 처남이 둘입니다.

해서 울 마눌이 첫 째가 되었는데 처갓집 형제들도 한 번 모이는게 힘이듭니다.

다들 바빠서요.

이 번에도 이산가족 상봉행사 예고를 보며 제가 느끼는 건
우리 처갓집같은 경우에 이제 큰처남도 없으니 누가 이북의 형제들에게
관심을 두겠나 하는 것 하고 그 곳의 형제분들도 이미 나이가
우리 부모뻘일텐데 생존여부도 불투명하지요.

1983년도에 이산가족찾기를 시작할때 이미 장인어른이 돌아

가셔서누가 찾을 방법을 몰랐을 터이나 같이 내려 오신 처고모님은 내외분이 함께 내려

오셔서 장인어른 만큼은 절실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당시 같이 거뒀던

5촌 조카도 여기 와서 가정을 꾸렸으니 그렇고, 결국은

이렇게 남과 북의 이복형제들은 얼굴이나 존재도

모른채로 남남이 되고 마는것입니다.

북의 위정자들이나, 그 곳에서 내려와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 곳 일부 인사들의 속마음은  "지금 이대로" 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직도 생을 마감하기 전에 이북의 피붙이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 월남 1세대 어르신들의

목메인 부르짓음이 귓가에 쟁ㅈ합니다.

 

여러분!  그대들, 식솔을 만나려고 울부짓는 그대들을

우리가 응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ㅡ 2015.9.9 남산에서 "해오라기의 꿈" 올림 ㅡ

 

 

 

   D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