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習作日誌

"그 사내, 뒤를 돌아 보다"

 

 

 

어제 여기 근무지에서 첫 당직을 하고 이제 아침이 되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신입이라 주간에 근무하는 기전대리가 같이 근무를 했다. 작업 중 손을 다쳐 손톱이 한 개 빠졌으니 얼마나 아프겠는가. 젊은이라 몸을 아끼지 않고 작업을 하다 다친 모양인데 조심 또 조심을 해야 한다. 그래야 나 자신도 보호하고 동료나 책임자에게 부담을 지우는 걸 방지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조금 많이 다쳐 산재보험을 받을 수 있어도 내 몸으로 일을 해서 보수를 받는 것보다 나을 일이 아니고 가족들에게도 걱정을 끼치게 되니 항상 조심을 해야 한다. 어제 나는 초저녁에 일찍 잠을 자고 새벽세시에 동료와 교대를 했는데 그 새벽시간에 어느 세대에서 냄비에 음식물을 올려놓고 태우는 바람에 화재경보가 울리고 누가 신고를 해 경찰이 출동을 하고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세대에 올라가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를 않아 더 고생들을 했다는데 그런 경우에는 빨리 문을 열어 주어 비상사태를 조기에 종료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지만 사후 대처가 더 중요하다.

 

- 서른한 번째 이야기.

 

우리 형제들이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 전에 마음고생들을 하고 자라 지금도 그 기억이 남아 있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잘못 만나 고생을 한 아버지, 그리고 엄마의 어릴 때는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일남 삼녀 중 막내딸이었으니 생활의 빈부를 떠나 아마도 외할머니의 귀여움을 받지 않았을까 싶은데 시어머니와 시동생 그리고 손위 시누이가 있고 아무 재산도 없이 딸랑 초가집 한채뿐인 집으로 시집을 왔으니 우리 외가도 겨우 살지 않았을까 싶다. 외갓집 큰 이모와 외삼촌 그리고 둘째 이모는 전쟁 중에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신2리(벌터라고, 논 중간에 있던 마을이라. 지금 수원 영통지구 부근 태장초교에서 가깝다)로 피난을 내려가 자리를 잡고 살고 우리만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살았다. 그렇게 살다 띠동갑 맡누이가 열아홉 그 아래 열네 살 그리고 열한 살 세 딸과 일곱 살에 일 학년을 들어갔던 나, 그리고 세 살이던 남동생을 두고 1960 음 시월에 병환으로 돌아가셨으니 당시 역시 나와 띠동갑에 겨우 마흔셋이던 남편을 두고 눈을 감았으니 눈이나 제대로 감으셨을까 싶다. 그래 큰누이가 살림을 하게 되고 아버지는 영등포 신길동에서 미아리 하월곡동에 있던 개인이 운영하던 작은 종이공장에 기관장으로 다니셔서 지금의 나처럼 격일 근무를 하셨고 비번 날은 우리 집에 국수틀을 놓고 국수를 뽑아 넓은 마당에 널어 말려 일정한 크기로 잘라 묶어 팔았다. 나는 아주 어려서 겨우 일부분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엄마가 아프기 시작을 하고 그만두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내가 다 커서 신길동을 떠나기 전까지 신길동에서 오래 살았던 舊대인들은 우리 집을 큰누이 이름으로 부르거나 국숫집이라 했었다. 그렇게 큰누이가 살림을 하고 동생을 키우다 아버지가 다니시던 공장의 아주머니께서 지금 병원에 계신 엄마를 소개해서 딸하나 키우고 살던 엄마가 우리 아버지와 살림을 합하는 바람에 큰누이는 살림에서 벗어나고 아버지도 한시름을 덜게 되고 딸하나와 살며 재산을 모아 놓았던 엄마의 도움으로 우리가 살아가게 되었다.

 

-오늘 여기까지.

 

첫 당직을 마치고 이제 아홉시가 되면 교대하고 퇴근을 한다. 월요일에는 민원이 많아 여기도 힘들겠다 했는데 어제 화요일에는 민원도 많지 않았고 또 젊은 기전대리가 업무를 잘 알려줘 그래 근무를 해보자 마음을 정했다.

 

봄이다.

새 마음으로 살아 보자.

 

- 2023. 4. 12. 영등포 근무지에서 "늘근 사내" -

'習作日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사내, 뒤를 돌아 보다"  (0) 2023.04.30
" 그 사내, 뒤를 돌아 보다"  (2) 2023.04.20
"그 사내 뒤를 돌아 보다"  (0) 2023.03.29
"그 사내, 뒤를 돌아 보다"  (0) 2023.03.23
"그 사내, 뒤를 돌아 보다"  (0) 2023.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