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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일기

#. 연희동 일기(1,022)

 

 

 

어제 이야기

 

그제 생을 마감했다는 연락을 받은 집안 동갑내기 형제의 문상을 하러 가는 길, 전에 영등포 신길동에 살 때는 훤하던 길이 지하철역에 내리니 방향가늠도 안되고 포털에서 길 찾기도 생각을 못해 지나가는 청년에게 물었더니 그도 모르는지 얼른 길찾기를 해서 방향을 알려줘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고 왜 그 생각을 못하고 젊은이가 폰 삼매경인데 신세를 졌을까 생각을 했다. 한참을 걸어 예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는 병원을 찾았는데 그 병원도 확장을 해서 제3병동까지 늘었고 바로 옆에 비슷한 이름의 큰 병원도 언제였는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례식장으로 내려가니 빈소 앞에 있는 이들 중 아는 얼굴이 보이 지를 않아 동생 이름을 대고 어디 있나 물으니 바로 옆 상에 앉아 있는 이를 가르쳐서야 나이를 먹어 같이 늙어 가는 동생을 볼 수 있었고 그도 얼른 일어나 나를 빈소로 데리고 갔다. 1월생이니 5월생인 내게 형이라 그 부인 형수를 찾으니 역시 나이가 많아 몰라 봤던 여인이 다가오고 몇 번 보진 않았어도 나를 알아봤고 그렇게 오래간만에 슬픈 만남을 했다. 

 

망자는 나하고 1960년 만 6세, 우리 나이로 일곱살에 국교입학을 했고 1965 6학년은 한 반에서 공부하고 졸업을 같이 했다. 그 해에 우리 집안 1953 생 세명과 1954 생 두 명이 입학을 했는데 여자 둘과 남자가 셋이었다. 그중 나는 한 살이 줄어 1955가 입학을 했는데 아마도 당시에 동사무소 근무를 하던 당숙의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이야 한살 줄은 게 도움이 되지만 고교시절에는 동창들의 놀림을 많이 받았고 지금도 동창 모임에서 만나면 놀리는 ㄴ ㅓ ㅁ들이 있다. 여하튼 그렇게 국교를 졸업하고 부터는 같이 한 기억이 없고 어제 동생에게 물었던 왜 일찍 고향 신길동을 떠났는지의 답은 그냥 고향 동네에서 좋은 일도 없고 해서 개봉동 쪽으로 이사를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동생 얘기가 어려서 고생을 많이 해서 고향에 가기가 싫다고 했다. 그런데 집안마다 사정이야 조금씩 달랐지만 우리도 다른 박가네도 사정은 비슷했고 열댓 집 집안중 세집만 잘 살았을 뿐 나머지 집들은 그 집 살림이 그 집 살림이었다. 농토나 땅도 없고 식구들은 많고 밥을 굶지 않을 정도의 살림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평생을 성실하게 사셔서 우리 자식들 밥을 굶겨 본 적도 없고 일곱 살에 오 남매를 두고 돌아간 엄마가 병치료를 받느라 빚까지 지고 집안 할아버지께서 운영하던 `신길옥`에서 쌀도 외상으로 가져다 먹은걸 나도 알고 있다. 아버지가 상처를 했던 그해에 마흔셋의 젊은 나이였는데 할머니인 어머니를 모시고 세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오 남매와 함께 홀아비가 되신 것이다. 이 일기를 쓰는 지금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지금 병원에 계신 엄마를 같은 공장 여사원이었던 아줌마의 소개로 만나 우리 집 식구가 되고 엄마가 딸하나 고교생과 살며 모아놓은 돈이 많아 우리 집이 그 덕을 보게 되었다. 아마도 쌀값도 갚고 나머지 살림도 보태게 되었는데 당시 엄마 얘기가 아버지 월급으로는 열식구가 먹어 대는 쌀 두 가마를 살 돈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가 모은 돈으로 우리 집 살림을 했던 것이다.

먼저 얘기, 망자는 중학교를 DY 중학교를 갔을 테고, 왜냐하면 그 공고를 졸업했으니. 그리고 나는 담임의 소개로 경기공고하고 같이 있었고 지금 아현중학교 자리에 있던 경서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때까지는 내 성적이 한 반 80여 명중 상위권이었고 망자는 하위권이었다는 얘기인데 그때 성적이 중요한 게 아니고 고교 졸업을 하고 망자는 바로 취직을 해서 아마도 그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한 걸로 알고 있고 장가도 일찍 가서 어제 빈소를 지키던 둘째 아들이 마흔이 넘었다. 그리고 장가를 든 부인도 잘 얻었고. 어제 보니 보통분이 아니었다. 아마도 웬만한 남자들 꼼짝도 못 했을 그런 양반이고. 나도 꼼짝을 못 했으니. ㅎㅎㅎ.

그리고 중요한 얘기 망자와 동생 그들이 집안일에 참석을 안해 집안일을 늘 알리느라 수고하는 동생이 전화를 했더니 내 아래 동생들은 잘 모르고 또 아는 이들도 집안일에 다니지를 않았다고 갈 생각이 없다고 하더란다. 물론 사회생활을 오래 해 빈소에 문상객은 많았어도 집안 친척들은 나하고 그 동생 둘 뿐이었다. 그리고 그 집 장조카가 왔고,

우리 아내도 돌아 가신 장인어른이 이북분이라 큰일을 치러 보질 않아 내가 지금도 박가네 큰일에 참석하는 걸 이해를 못 하고 더군다나 살림이 빠듯해 더 그러는데 이해는 하지만 좀 그렇다. 그래 축의금이든 부의금이든 아내가 이해하는 큰일이 아니면 내가 준비를 한다. 그래야 용돈을 줄이거나 할 뿐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도 상을 치러야 하는데 상부상조가 아닌가 말이다.

 

그래도 요즘 화장장 구하기도 힘들어 5일장을 치르는데 망자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에서 오늘 화장을 모시게 되었다고, 물론 화장비용이 비싸지만 5일장 치르는거 보다는 덜 든다고.

아마도 오늘 화장을 잘 모시고 납골당으로 갔겠지.

 

- 2023. 1. 10. 오늘은 외부 계단입구 계단참 청소를 했다. 아마도 올해 처음이 아닌가, 먼저 계단도 그렇고. "연희 나그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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