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내가 다섯 살 무렵에 대한 기억이 나는 세 가지, 하나는
그 때까지 할머니 등에 업혀 다니다 한동네에 살던 동무의 엄마께 다 큰
놈이 할머니 등에 업혀 다닌다구 혼이 났던 기억, 아버지를 따라 영등포
큰시장(지금도 있음)에를 따라 갔다 해가 뉘엿 뉘엿 질때에 집에를 들어
오니 아기를 낳았다고 하던 기억(밑에 동생,1958년생), 그리구 오늘의 얘
깃거리인 고리땡(골덴) 바지에 대한 기억입니다. 누이 세명 아래로 자란
맏아들이라구 당시에 아마 처음 나왔을 고리땡바지를 사주었는데 오래
입으라구 너무 큰걸 사줘서 두고 두고 몇년을 입었습니다, 원래 신발이고 옷
이고 사내놈이 너무 곱게 입어 신발같은 경우 국교 고학년 무렵 내 기억으로
운동화(지금의 스니커즈형인데 당시에는 조악했을 것임)를 사주면 6개월 정
도를 신었을 정도로 비 활동적 이었다는 건데 그래서 그 큰 고리땡 바지를
국교 저학년까지 5년여를 입었으니 얼마나 큰 걸 사줬는지 가늠이 될겁니
다. 그런 세월을 살았지만 장성해서는 장남이라는 무게 때문에 정신적으
로 부담이 많이 되기는 했지요.
어려서는 할머니의 장손귀하게 대하기의 혜택과 누이들, 특히 막내누이와
차별을 받고 자랐습니다.
이후에 올렸던 글은 학습관 예약시간이 지나서 또 날려 버리고 지금 십분코
너에서 다시 시작을 하는데, ㅎ ㅠ .
특히 막내 누이가 다른 누이들 보다 심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해는 되고
미안하기는 하지요. 당시에 돌아 가신 아버지께서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던
조그만 개인이 운영했던 종이공장(중앙제지)에서 기관장을 하셔서(현재는
제밑의 동생과 저도 보일러쟁이를 하고 있습니다.규모만다르지요) 공장에서
가져 오시는 종이로 공책을 만들어 주셔서 누이들은 그걸로 공부를 했고 저는
아들이라구 공책을 사서 쓰게 했는데 그 것도 그렇고 여러가지가 질투와 시
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남녀의 차별, 아들과 딸의 차별을 지금 아이들
은 어떻게 받아 들일지 궁금합니다. 불과 한세대 전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우리 친구님들,
우리는 그런 시절을 살아 내었고 우리 부모님들은 훨씬 더 척박한 시대를
사신 존경스런 분들입니다.
그져 알고 사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애게 무엇을 바라는게 아니구 이런 시
절도 있었다는 걸 잊지는 말자는 얘기입니다.
오늘 아침에 그 "고리땡 바지" 가 그리워집니다. ㅎ ㅜ .
^^^ & .
- 2015. 12.30 "연희 나그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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