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習作日誌

"그 사내' 뒤를 돌아 보다"

 

 

 

오늘도 하루를 보내고 금방 저녁을 먹고 매일 하는 설거지도 끝내고 이제 컴 앞에 앉았다.

우리, 나보다는 훨씬 젊은 선임께 오늘도 목소리를 내고 말아 마음이 편치 않은데 본인도 문제가 있다는 걸 전혀 모르니 서로 힘이 들고 딱할 노릇이다. 물론 하다 안 돼서 제일 나이가 많은 나를 뽑은 관리소장의 뜻을 아는지라 웬만하면 실망을 주기도 싫고 또 이 년여 받지 못한 퇴직금과 연차수당을 이번에는 받아 보고 싶은 생각도 있고. 그리고 우리는 정규직이 아니라 보너스도 없고 두 번 명절에 금일봉, 그리고 여름휴가비 명목의 봉투와 혹 한번 더 주는 곳에서는 연말에도 주는 데가 있다. 오늘 소정의 떡값을 받았는데 입사 한 달이 안돼 안 줘도 그만인걸 소장님이 대표회장께 잘 얘기해서 고맙게 받았으니 더 열심히 근무를 해야 한다.

 

- 열다섯 번째 이야기

 

 

그렇게 여의도 광장도 떠나고 83년 봄에 잠깐 나가 누이네 장사를 도와주고는 그 뒤로도 이렇다 할 일도 하지 않고 세월만 보내다 1987년 초가 되어 장가를 갈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그전에 정말 잊으면 안 될 아버지 얘기를 놓쳐서 이제 풀어놓으려 한다.

우리 아버지 1982.1.1(음 12.7)에 돌아가셨는데 맏아들이 너무 不孝를 해서 장가를 들고 가정을 가지고서야 가슴에 맺혀 아버지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줄줄 나는 일생을 살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살았을까 내가 생각을 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니 당시의 나를 아는 친구들이나 집안 어른들, 그리고 한동네 사람들 동창들 모두 얼마나 한심했을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우리 아버지는 1918년 역시 신길동 우리 고향집에서 태어 나셨을테고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그러니 아버지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고 아버지인 할아버지 형제분은 아들은 혼자에 누이들이 세분이었는데 막내 여동생이 우리 동네에서 사셨고 두 분의 누이들은 인천과 평택으로 시집을 가셨다. 그리고 어머니인 할머니는 지금 안양 청계산 아래 동네분으로 우리 할아버지께 시집을 오셔서 챙겨 댁으로 불리셨는데 그 동네에 산밤이 많아 밤골댁 네로도 불린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장남으로 태어나셨지만 위로 누님 한분과 아래로 남동생 하나를 보고 자라다 아버지인 할아버지가 아버지 여덟 살이 되어서 그 어린 삼 남매와 꽃같이 예뻤을 젊은 우리 할머니, 그리고 당신 부모를 두고 집을 나갔다고. 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어떤 경우든 무책임의 극치였다. 그렇게 집을 나간 이유 중 하나는 당신 아버지 내게 증조할아버지가 집은 째지게 가난해도 집안 큰일에 자기 앞에 상이 빨리 오지 않으면 마당으로 상을 내던지는 그런 불같은 성정이었다고 들었는데 당신 할아버지는 성격이 유하고 나중에 우리 집에 들어오셔서 봤지만 술, 담배도 하지 않는 분이셨다. 그러니 그 아버지의 불같은 성질을 받아 내기가 힘들었을 테다. 다른 이유는 들은 적이 없어 모르겠고. 아무리 그래도 어린 처자식을 두고 어떻게 발길을 돌리셨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신이 그렇게 사라졌으니 누군가 벌어야 식구들 생계유지를 하지 않았겠는가. 보통의 경우는 집안의 여자, 엄마가 치마를 걷고 무슨 일이든 했겠으나 우리 할머니는 내가 다섯 살 무렵부터 일부 기억을 하는데 그때에도  무슨 일을 하시는 걸 본 기억이 없으니 그 어린 여덟 살짜리 아들이 일본인집에 가서 소달구지를 몰아 벌어 오는 걸로 생계유지를 했다니 우리 아버지의 고생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시작이 된 일이다. 그렇게 고생을 하시고 잘다 커서 장가를 가게 되는데 장가를 가서 오 남매를 두고 살다 몇 년을 병을 앓던 우리 엄마가 내가 일곱 살 일 학년, 띠동갑 맡누이가 열아홉, 내 아래 남동생이 세 살 때 그만 병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우리 아버지도 내하고 띠동갑이셨으니 불과 마흔셋이었다. 몇 년을 병치다꺼리 하느라 빚까지 남겨 놓고. 가신분도 불쌍하지만 아내를 잃은 젊은 아버지도 그리고 엄마를 잃은 우리 오 남매도 모두 불쌍한 식구들이었고 그리고 삼 년 후에 딸하나 키우고 살다 아들이 부러워 우리 집으로 살림을 합치신 우리 엄마도 그렇고. 우리 집에 오셔서 낳은 우리 막내 동생 그 남동생이 올해 육십이 되었고 2014.10월부터 우리 엄마를 일반병원에서 24시간 간병을 하고 있다. 혼인도 안 하고.

아버지 무릎에 앉아 본 유일한 우리 형제인데 저렇게 늙어 가는 게 안타깝고 올해 아흔아홉이 되신 우리 엄마도 안타깝고 불쌍하고. 그리고 코로나 때문에 이제 만 삼 년째 엄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가끔 병원에 가서 막내 얼굴이나 보고 돌아오는 우리 막내 외의 사 남매도 가슴이 저린다. 제일 위 맏누이도 일찍이 오 남매(딸넷에 아들하나, 나머지 세 누이는 모두 아들만 둘)를 두고 1992에 혈압으로 일찍 가고 엄마가 낳은 누이는 1978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고생을 하시고 젊어서도 우리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느라, 당시 우리 동네에서는 아들들이나 학교 공부를 가르쳤지 딸들은 국민학교가 끝인 경우가 많았어도 엄마도 아프고 겨우 아버지께서 벌어먹고 사는데도 누이들 중학교를 보낸 분이다. 당신이 부모 잘못 만나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어도 딸들 가르친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고 그 아버지를 닮지 않고 공부도 일도 효도도 하지 않은 내가 얼마나 한심한 사람인가 비교가 될 것이다.-

 

- 오늘 여기까지.

 

부끄러워 혼자 있어도 얼굴이 벌게진다.

이제 설날도 나흘 앞이고 그날 근무라 하루 종일 근무지를 지켜야 하지만 우리가 있어 주민들이 편안하니 아니 좋겠는가.

 

- 2023. 1. 18. 수요일 저녁을 보내며. "늘근 사내" -

'習作日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 사내, 뒤를 돌아 보다"  (0) 2023.01.25
"그 사내, 뒤를 돌아 보다"  (1) 2023.01.23
"그 사내, 뒤를 돌아 보다"  (0) 2023.01.14
"그 사내, 뒤를 돌아 보다"  (0) 2023.01.13
"그 사내, 뒤를 돌아 보다"  (0) 2023.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