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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오던 즈음.

 

 

 

1954. 음 5.15일생인 나는 세 누이 아래 장남으로 태어났다. 

띠동갑 1942 생 맏누이 아래 남동생을 보고 둘이 같이 홍역을 하다 딸은 살고 아들은 그 어린 나이에 먼저 가서 호적에도 올라 보지 못했고 그 뒤로 딸을 둘 더 낳고 내가 태어나 장남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아마도 우리 형처럼 그렇게 죽은 아이들도 많아 호적에 올리는 출생신고를 미루거나 먹고사는 일에 바빠 제 날자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흔했다. 물론 내가 다 자라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호적에는 1955. 5. 14일로 등재가 되어 있고 실제 국민학교 입학은 1960년도에 해서 1966년에 국교졸업과 중학교 입학을 했고 역시 1969년에 중학교졸업 그해 고교입학 그리고 1972년도에 나의 학교생활이 끝이 나게 된다.

동창생들은 보통의 경우 1953, 1954년 생들인데 그 이상도 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같은 건축과 바로 뒤에 앉았던 동창생도 나처럼 1955년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내 고향 신길동 옆 대방동, 지금 대방역 부근에 살아 군대생활 첫 휴가 귀대를 할 때 떡상자를 가지고 우리 집에 들렀다 가기도 했다. 제대하고 당시 5급 건축직공무원을 시작해 정년퇴직을 하고 지금은 운동 겸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여생을 즐기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서로 생활이나 생각이 달라 만나기가 힘들다. 다른 동창들도 그렇고. 내 일기를 톡으로 몇 동창에게 보내는데 그 친구에게 몇 번 보냈더니 제영아 네 일기는 나나 봐라 했다.

1972.1월 고교를 졸업하고 얼마를 하는 일없이 지내다 역시 동창의 친구로 내가 중3부터 고교 졸업 다음해까지 만 5년을 살았던 성북구 하월곡동에서 가까운 대지극장옆에 살던 친구의 소개로 그 작은아버지가 관계했던 경상도의 토건회사 현장이던 김포군 양곡면의 군부대 안의 현장사무소에 기사보로 가게 되었다. 말이 기사보지 기사도 없고 해병대 중령출신의 현장소장과 둘이 근무를 했고 딱 급사노릇이었다. 시멘트가 밤에 들어오면 하차도 해야 했고 군부대에서 55G/L 드럼통에 담긴 휘발유를 빼돌려 파는 걸 사다 작업차량이나 소장용 지프차에 사용을 했는데 드럼통에 호스를 넣어 입으로 빨아 올라오게 해서 차량기름통에 넣는 일, 그래서 양팔에 기름독이 오르기도 하고 비 오는 날이면 현장사무소안 침상에 누워 소장 다리를 주물러 주기도 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고 부대안 해병대원 내무반에 TV가 있어 저녁이면 마침 `여로` 가 방송이 되었고.

바로 그 해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몰래 이북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밀서를 가지고 내려온 사실을 국민들에게 발표한 날이 1972.7.4이었다. 그렇게 국민들의 시선을 돌려놓고 그해 10월 17일 10월 유신을 선포한다. 그리고 국회를 해산하고 종신제 대통령을 시도하고. 그 뒤로 7년을 더하다 수하의 손에 비명횡사를 하고 또다시 나라를 혼란에 빠뜨려 무식하고 용감한 그의 후예들이 군정을 하는 역사의 오류를 범했고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렇게 현장생활을 하다 추석이 지나고 기온이 내려가 일거리가 줄어 드니, 당시에는 가을이 지나 겨울로 들어 서면 공사현장의 작업이 중지가 되었다. 그래 그만두게 되는데 당시의 공사가 김포읍에서 강화도로 들어가는 다리까지 도로를 넓혀 포장하고 중간에 팔각형의 해병검문소, 그리고 우리 현장사무소가 있던 지원중대 탄약고 신설, 당시 2 여단 사병내무반신축 등등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73. 2월쯤 하월곡동 아버지께서 근무하시던 종이공장 개량한옥 사택을 비워주고 신길동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해 12월 공부는 일도 안 하고 고교동창 둘과 예비고사를 봐 그 둘은 합격을 해서 대학입학 졸업을 했는데 결국 둘과는 멀어졌고 하나는 대학에서도 건축을 전공해 지금도 건축기술사 자격으로 아파트현장감리를 한다. 째지게 어려운 집안에서 자기 힘으로 노력해 사는 게 장한데 작년 12월 친구 장례식장에서 우리가 이대 앞에 살던 때 아현동 아파트현장소장을 하며 어떻게 전화 한번 없더라 했다고 친구란 물건이 내게 눈에 불을 켜고 먹고살기 바쁜데 무슨 연락이냐고 너는 왜 그렇게 궁상을 떠냐고 공격을 해대고 그 부인도 합세를 해서 그만 보기로 작정을 했다. 1979년 친구나 동창들 중 제일 먼저 장가를 가서 내가 사회를 봐줬고 전날 함이 가는데 가방 살 돈도 없어 예비고사합격해 대학을 다닌 다른 친구와 내가 축의금으로 사서 가지고 갔던 물건이. 그리고 또 한 물건은 고교 과단톡방에 누군가 나를 초대해 내가 쓰는걸 게시를 했더니 내게 너무 나댄다고 지랄을 해서 깨지고 다시 안볼 작정이고. 물론 내가 여유가 없어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을 못 견디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왜냐하면 지들 잘 나갈 때 내가 한잔 얻어먹은 적이나 연락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아서라 내 코가 석자에 무슨 철딱서니 짓인가.

 

- 2024. 7. 4 내 숙소근처 `동작도서관` 지난해 12월부터 휴관을 하고 수리작업 7.1일에 재개관 후 처음 왔다. "연희 나그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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