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
일남 삼녀중 한분인 외삼촌께서는 내가 기억이 날무렵인 국교 저학년부터
방학에 누이들을 따라 외갓집과 두 이모네가 모여 살던동네에 내려 가면
외삼촌댁에는 안방에는 외삼촌이 자리를 잡고 계셨고 거넌방에는 외할머니가
자리를 잡고 계셨는데 외삼촌은 중풍과는 다른 사지마비 같은 증세로 앉아서,
외할머니는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노환으로 누워계셨던거 같은데 이 두분의
수발은 외삼촌댁의 몫이었습니다. 물론 외사촌형들이 요강을 비우는 정도의 일은
했겠지만 식사나 빨래등등은 아마도 외숙모의 몫이었을 것이고 당시에는 외사촌
누이가 시집을 가기 전이니 부엌일은 도왔겠지만이요.
우리 외삼촌 언제부터 병환이 왔는지는 몰라도 참 일생이 대단한 분이었지요.
외사촌형들이 세명에 동생이 하나 해서 아들이 넷에 딸이 둘인데 위로 두명의 형들이
한분, 셋째 형이 한분, 그리고 누이와 동생, 그리고 막내 여동생이 한분, 자식이
없었던 분도 있었다니 내가 아는 외숙모의 숫자만 네분입니다. 마지막을 지켜 주신
외숙모님이 제일 고생을 많이 하신걸로 알고 있구요. 그 분이 제게도 참 잘해 주셨고
제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할 때 큰이모와 함께 서울까지 오셨던 잊지못할 고마운
그런 분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소위 전실자식 세명을 키워서 일가를 이루어 주었지만
위로 두명의 형들이 내 보기에 제대로 엄마대우를 하지 않았고 특히 본인도 고인이
되었지만 큰형내외가 참 서운한일을 많이 했지요. 외삼촌은 내가 제대하기 전인
1978년도에 큰이모가 1992년, 외숙모는 1993년에 돌아 가셨습니다.
그렇게 외숙모에게 서운하게 했던 본인들도 형은 중풍으로 거의 이십여년을 고생하다
지난해 돌아 갔고 형수는 그 형의 뒷바라지에 시달리다 일년 먼져 돌아 갔는데 더
딱한 것은 남겨진 자식들 사남매중 막내로 아들 하나만 일본인과 결혼, 나머지 딸
둘과 큰아들은 오십이 다 되었는데 출가들을 못하고 살고 있어요.
둘째 형도 아들만 둘인데 그들도 어째 결혼을 안하고 나이가 오십이 다 되어 가지요.
아직들 ^짝^ 을 못 찾아서겠지만요.
외삼촌은 두 여동생도 먼져 보내고 누님인 큰이모보다는 앞서 갔으니 여러가지로 비운의
일생을 살다 가신 분입니다.
ㅡ 중 략 ㅡ
- 2016. 8. 19 마포 평생학습관에서 "연희 나그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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