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이모
우리를 낳아준 엄마의 형제는 제일 위로 큰이모, 그리고 외삼촌, 둘째 이모,
그리고 우리 엄마가 막내였지요. 헌데 돌아 가는 것은 둘째 이모. 우리 엄마,
한참뒤에 외삼촌, 큰이모가 제일 먼저 태어 나서 동생들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제가 결혼하는 것까지 보시고 돌아 가셨습니다. 우리를 제하고 세분들이 모두
지금의 수원 영통지구에서 가까운 벌터라 불리던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태장면)
신2리 에서 모여 살아서 국교 1학년에 엄마를 잃고는 방학이 되면 큰누이가 저와
남동생을 외갓집에 데려다 주면 한참을 지내곤 했지요. 주로 제가 많이 다녔고
지금 생각하면 어려서 부터 좀 쌀ㅆ맞았는지(ㅋ) 네살 아래 동생을 별로 챙기지를
않았어요. 데리고 다닌 기억이 별로 없고 해서 다 자라서 생각하니 미안했던
일입니다.
그렇게 방학동안 외갓집에를 가면 세집에서 번갈아 끼니를 챙겨 주고 서울서
자라는 아이고 일찍 엄마를 잃었다고 이뻐해 주었습니다. 특히 큰이모는 아들이 없이
딸만 하나를 두어 이미 그 때는 이종 사촌누이의 조카들이 큰 조카들은 저보다 나이가
많았고 막내 딸만 저보다 세살이 아래, 아들이 없어서였는지 모르지만 제게 참
잘해 주었습니다. 친정 조카들인 외사촌형들과 동생,둘째이모네의 하나 있던 아들,
제 이종동생은 큰 이모를 어려워 했는데 저만 고교를 졸업하고는 이모와 맞담배를
피웠던 유일한 조카였습니다. 지금 돌아 보면 대단한 버르장머리였지요.
그 큰이모의 일생을 돌아 보면 힘든 일생이었다는 생각에 눈앞이 서먹해집니다.
원래 이모부와 두분이 벌터에서 구멍가게와 막걸리를 함께 파는 주막 비슷한
가게를 하셨고 논이 꽤 많아서 서울 청량리에 살던 이종누이네 식구들이 하던일이
시원치 않아 이모네로 내려와 같이 살았는데 아무래도 외갓집이나 둘째이모네
하고는 다른 여유가 있어 여름에도 쌀밥을 먹었고 외갓집은 보리만으로 지은 밥을
먹었는데 저는 어려서나 지금이나 밥을 잘 먹어서 더 귀여움을 받았지요.
그렇게 이모의 재물로 외손주들을 가르쳐 큰 손주는 서울의 경기공고를 졸업하고
서울교대를 나와 국교 교감까지 역임을 하고 둘째 손주도 고교시절에 청소년 적십자
활동을 열심히 하더니 경기도 적십자사에서 직장생활을 오래 하고 지금은 부평에서
자동차공업사를 하지요. 막내인 손녀는 지금 경기 화성에서 동장을 하구요. 이 조카가
어려서 저를 아저씨 하면서 많이 따랐는데 제가 군대생활을 하던 때까지, 올해 우리
마눌과 동갑이라 육십이 되었어요. ㅎ .
그 시절,
외동딸인 누이가 이모를 닮아서였는지 서로 한성질을 해서 친정엄마에게 기대어 살면서도
서로 많이 부딪혀서 어린 내가 보기에도 참 그랬던, 그런 세월을 보낸 분인데 지금은
이모도 누이도 돌아 가신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 중 략 -
-2016. 8. 13. 쉬는 날인데 저녁에 연장근무를, "연희 나그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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