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7월 제대를 하고 바로 취직도 못하고 시간을 보내다 1980년 봄에 고교 같은과 동창의 소개로 당시 신설동에 있던
동대문구청 앞의 설계사무소(일명 허가방)에 신입으로 들어가 도면그리는 방법부터 새로 배우기 시작을 했다. 그 봄이 우
리나라 정치판에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앞이 안보이는 캄캄한 시기였다. 이른바 3김이 자신이 정권을 잡겠다고 각자 행
동을 하고 최 규하 대통령은 말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었고 10.26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얼굴을 알린(지금은 사망한)
소위 보안사령관의 움직임이 시작될 때였다.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원하는 국민이나 정치권의 3김을 비롯한 민
주화 열망을 가진 국민들의 바람은 멀어지고 매일 데모로 날을 지새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던 5.17일 갑짜기 전국에 비상
계엄이 선포되고 전국의 대학과 정부 주요기관에 계엄군이 진입, 통제를 시작했다. 꼭둑깍시 대통령은 물러나고. 그날
부터 전남 광주 일원에서 시작된 민주화 시위가 서울에는 알려지지도 않고 5.18일 일간신문에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 났
다는 보도만 하고 일체의 현장상황을 방송이나 신문에 비보도로 이어 갔다. 그날 서울 시내도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로
대중교통이 모두 멈춰 신설동에서 영등포 신길동까지 걸어서 퇴근을 하고 남대문에서 학생들이 전경버스를 언덕에서 밀
어 내는 순간도 목격을 했는데 나중 뉴스에 전경 한명이 깔려 사망을 했다고 나왔었다. 학생도 전경도 모두 희생자였던
시대의 아픔이었다. 학생도 아니고 일반 직장인도 아니었던 나는 방관자의 입장이었지만 당시의 민주화운동을 했던 시
민들과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제 당시 정치군인의 핵심이었고 대통령까지 지낸 두명의 군인이 작년에 약속이나 한듯이 사망을 했는데 내가 지금 살
고 있는 동네 연희동에서 한동네 주민으로 살게 될줄은 꿈에서도 몰랐다.
그리고 그 뒤 한참을 지나 1987년 6.29선언을 한 며칠 후 7.3일에 넥타이부대를 바라 보며 늦장가를 갔기에 그들에게 두
번째 미안한 마음을 안게 되었다.
내일 광주에서 열리는 5.18 기념식에 대통령과 집권당 국회의원이 모두 참석을 한다니 그도 좋은 일이 아닌가.
- 2022. 5. 17. 녹음이 우거지고 기온이 올라 가기 시작을 했다. "연희 나그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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