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추억(3)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무렵에도 신길동 동네에 자기집이 없어 남의집
방한 칸에 세를 살던 집이 꽤 있었는데 그 좁은집 좁은방 한 칸에서 여러명이
어찌 지냈을까 하는 생각에 우리들이 태어나고 자랐던 5,60년대도 부모들보다는
좋아진 시절이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너무도 어렵던 시절이었음을 실감합니다.
그 당시에도 치맛바람이 불어 아이들이 육학년이 가까워지면 좋은 중학교에를 보내기 위해
과외를 시켰고 동네에서 세를 살던집 아이들도 과외를 했지만 저는 육학년 담임선생님이
불러서 성적이 괜찮은데 과외를 하면 더 좋은 성적을 받을거라고 권했지만 우리는
과외를 할 형편이 아닙니다 하고 나왔고 성적에 대한 걱정은 안했는데 그 이유는
단순암기력이 좋아 어느 정도는 자신감도 있었기 때문이고 아버지 혼자 월급으로
생활을 하고 엄마얘기가 월급으로는 한달에 쌀 두가마(80Kg)를 살 돈밖에 안된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밥밖에 먹을게 없어서) 당시의 한학급 학생숫자는
80여명이었는데 지금과 비교하면 가정에서 아이들이 많아 아이들끼리 자랐듯이
학교에서도 스스로 알아서들 공부를 했고 성적대로 중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우리 동네에서
같은 학년의 아이들이 이십여명이 입학시험을 보고 진학을 하게 됩니다. 저는 담임선생님이
권하는대로 신길동에서 먼거리인 지금의 아현전철역앞 아현중학교건물에 있던 `경서중학교`에
전기 입학시험을 보고 합격을 해서 다니게 되었는데 그 먼곳까지 간 이유는 당시에 공고중
최고였던 경기공고가 있었기 때문이며 집안이 넉넉치 못한거 같은 제게 선생님이 권해서였고
그 의견에 따랐던 겁니다.
여의도가 개발이 되기 전이라 꼭두 새벽에 집에서 나와 한 시간정도를 버스를 타거나 전차를
타고 한강을 건너 광화문에서 돌아 서대문 충정로를 지나 굴레방다리까지학교를 다녔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은 키에 가방이 땅에 질질 끌리는(보던이들의 표현)상태로 다녔지요. 동네
동기 동창들 중에서는 실력으로는 제일 좋은 학교에 입학을 했고, 1966년 당시에는 원호대상자의
자녀들은 특혜가 있어 두어명은 비슷한 이류(일류,이류,삼류, 그 이하가 있었음)정도에 들어간
아이가 있을 뿐, 5대공립이라는 학교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다섯학교중에 아래 두학교정도는
갈수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렇게 나의 중학교 시절이 시작이 됩니다.
- 중 략 -
- 2017. 4. 초하룻날에 "연희 나그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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