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이모
나를 낳아준 엄마의 사남매중에서 제일 맏이로 태어났던 우리 큰이모는
수원 근교, 지금의 영통지구에서 가까운 경기도 화성군 태장면(후에 태안면)
에서 우리 만 서울에 살고 나머지 세분들 큰이모와 외삼촌, 그리고 작은이모
이렇게 세집이 모여 살았습니다. 어렴풋한 얘기로 육이오때 모두 모인거 같은데
그 쪽, 수원에 엄마의 친정이 한동네는 아니지만 집성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입니다.
중략하고 제가 자라면서 기억이 남은건 국교시절 부터기 아닌가 하는데 방학에
내려 가면 큰이모네는 동네의 신작로 옆에서 조그만 구멍가게와 막걸리 같은 걸
팔았고 농사가 있었지만 누구에게 맡겼는지, 아님 하나 있던 딸과 사위가
서울에서 내려와 이모네에서 얹혀 살다 시피 했는데 아들 둘에 딸하나를 막내로
두고 당시로는 드물었던 동네의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종 누님이요.
허데 그 누님도 무남독녀로 혼자자라서인지 그렇게 친정에서 얹혀 살면서도 이모와
무슨일로 그러는지 툭하면 싸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누님이 잘못하지 않았나
싶고, 그 때 어린 나이에도 그랬지만, 이제는 무ㅗㄹ론 두분다 돌아가셨지요.
이종 누님의 나이가 지금 병원에 계신 엄마와 동갑이었으니요.
여름방학에 내려 가서 외삼촌네에서 자리를 잡으면 두 이모네에서 끼니때가 되면
밥을 먹으러 오라고 했는데 어느집으로 가서 먹느냐가 조금 고민일 경우였는데
그 시절 모두 어렵게 살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정이 좋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외삼촌네는 사촌들도 많았고 외삼촌이 거동을 못하는 병으로 안방을 지키고 사촌형,
특히 둘째형이 농사를 도맡았던걸로 기억이 납니다. 큰형, 지난 겨울에 돌아간 형은
맏이라고 일도 별로 안시키고 고등학교까지 다녔지요. 둘째와 셋째형이 농사일을
했구요. 그래서 사십여마지기 논 농사를 지어도 여름에는 보리쌀로만 지은 밥을
먹었고 큰이모네는 가게를 하면서 농사가 있구 식구가 누님네 오남매와 이모내외분,
그중 큰조카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녀서 없었고 해서 여름에도 쌀밥을 잡쉈지요.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식성은 좋아서 보리쌀로 지은 밥이나 쌀밥이나 잘먹어서 귀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둘째 이모네도 이모가 일찍 돌아 가셔서, 둘째이모는 기억이
전혀 없는데 방학에 가면 이종누이들 주로 막내 누이와 그때 같이 살던 새이모들이
있었지만 오래 같이 살았던 분은 없었고, 농사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누이들이 해줬던 칼국수를 마당에 있던 멍석위에서 먹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큰 이모는 저를 참 많이 보살펴 주었지요. 엄마를 일찍 잃어서 였구 당신이 악들이 없
는 것도 그랬을 것이구 해서였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만 멀리 서울에 살아서, 지금은
전철과 버스가 흔해서 가까운 곳이 되었지만 그 시절엔 그렇지가 않았지요. 저의
나이가 스무살 무렵 고교 졸업후에 담배를 배우고는 큰이모와 앉아서 맏담배를 피운
사람은 저밖에 없지요. 외사촌형들은 고모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울 생각도 못했구요.
어렸던 시절의 건방이었습니다.
ㅡ 중 략 ㅡ
-2016. 4. 21. 마포평생학습관에서 "연희 나그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