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벌터의 기억속으로(둘)
여름방학이면,,, & .
제 위의 네살 터울 막내누이는 언젠가 들으니 여름방학에 외갓집엘 가면
보리만 오르르 삶아서 먹는 밥이 싫어서 가기가 꺼려졌다구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달랐지요. 해주는 대로 잘 먹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립지요.
그 시절이요.
저는 어려서 계집애 처럼 이쁘게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들어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도 누이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는데 그건 좋은 기분이었지만 이쁘다는
말은 아주 싫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자는 남자답게 잘 생기거나 믿음직
한게 보기도 좋지요. 우리 형제들은 남녀가 조금 바뀐 편입니다. ㅎ ㅣ ㅎ ㅣ .
누이들에게는 좀 미안치만이요.
그래서 외갓집에를 가도 동네 ㅕㅇ들이나 누이들의 귀여움도 받았고 외사촌형들,
이종사촌 누이들에게는 말 할 것도, 외숙모님이나 큰이모에게서도 귀한대접을
받았는데 한가지 더 했던 이유는 서울녀석 같지 않게 보리밥이드 칼국수든 주는
대로 잘 먹는 식성때문이기도 했을겁니다. 저를 처음 보는 분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까탈스런 느낌을 바는다지만 먹는 걸 보면 복이 있겠다는 얘기들을 합니다.
첫인상과는 다르다는 말이지요. 식성은 완전 국산이라는 얘기요.
그 당시 여름방학에 내려 가면 형제들이 많고 외삼촌께서 거동을 못하는 상태라
외숙모님과 외사촌형들이 농사를 지어 살아서 보리만 삶은 밥을 커다란 양푼에
담아 두레반 가운데에 놓고 각자 수저만 나눠주면 함께 먹었는데 서울내기 라고는
해도 당시의 우리 동네인 영등포구 신길동에도 내가 중학교를 가던 무렵까지 논과
밭이 있던 시절이라 별 차이도없던 때여서 외려 시골밥이 더 맛이 있었습니다.
형이 없던 저는 외사촌형들이 좋기도 했구요. ㅎㅎㅎ.
하지만 그 시절에도 우리 큰이모네는 그 동네 한길가에서 잡화점을 하셔서 담배나
생필품과 막걸리를 팔고 농사도 있었는데 큰 이모는 무남독녀를 두셔서 딸네 식구와
함께 사셨는데 우선 식구가 적은데다(사촌누이네 넷, 이모 내외분 해서 여섯) 현금
소득이 있어서 한여름에도 쌀밥을 드셨고 둘 째 이모네는 우리 엄마 보다도 이모가
먼저 병으로 돌아 가셔서 이종 사촌 누이들이 살림을 할 때라 겨우 살아서 외갓집과
비슷했구요. 헌데 문제는 밥때가 되면 세 집에서 서로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하고
안가면 서운해 할 정도의 그런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병원에 계신 우리 엄마께 고마운것이 방학이면 우리를 외갓집에
보내주신겁니다. 아무 서운함도 없이 연을 이어 가도록 해주신거지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우리 엄마 저세상에 가셔도 우리를 키우고 거두신 것
만으로도 천당에서 모셔 갈 겁니다.
ㅡ 중 략 ㅡ
- 2016. 3.8. "연희 나그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