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ㅇ벌터의 기억속으로(하나);

연희 나그네 2016. 3. 6. 12:07



 

 

 

 

 


오늘은 아주 먼 옛 기억을 되살려 보려 합니다.

 
일곱살 일학년 가을 병으로 고생을 하던 우리 멈마가 음, 시월 스무날 서울대병원에서 돌아 가시구
남은 우리 오남매를 데리고 아버지와 맏누이(저하고 띠동갑,할머니 아버지 맏누이 저) 가 지금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시는 우리 엄마가 오시기까지 삼년을 고생을 했지요. 아버지는 제가 지금 하는일 ^ 보일러 쟁이
셨구요. 그 때도 지금의 저처럼 격일제를 하셨던거 같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쉬는 날은
집에 국수틀을 갖추고 국수를 만들어 팔았던 기억도 있고, 그래서 이제는 구대인들이 거의 다 떠난 고향에서
당시에는 <국수집>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아마 엄마가 아프시면서 그만두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지금은
저를 낳아준 엄마의 기억이 거의 없어요. 제 위로 당시 세명의 누이들은 남아 있겠지요. 바로 아래 남동생이
58년 개띠인데 엄마가 가실때 세살의 어린 나이 였지요. 지금의 제 기억은 병원에 계신 엄마와의 기억
뿐이구요. 우리 칠 남매를 키워서 남동생 둘을 대학까지 가르치시고(저는 제가 안해서 못가구요) 막내남동생
만 혼자고 다들 출가까지 시키신 대단하신 우리 엄마입니다. 남들이나 우리 형제들도 내색치 않으려는 가족사
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숨겨야 할 이유가 없지요. 아버지께서 뭐한 말로 바람을 피우신 것도 아니구
아버지도 당신의 ^복^이 그겄밖에 안돼서 여덟살에 당신의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께서 그 아버지 증조부의
한성격에 질려서 집을 나가시는 바람에 고생을 밥먹듯이 할머니와 하셨는데 일찍 어린 자식들을 두고 상처까지,
그래도 지금 엄막를 잘 만나셔서 말년에는 괜찮다 했더니 환갑을 두어달 남기고 풍을 맞으셔서 만 5년을 고생
하시구 엄마도 힘들게 하신 후에 맏아들 장가도 못간 상태로 가셨습니다. 옛말에 부모복 없음 다른 복도 없다구
자식복도 없으셔서,,, 생각하면 아버지, 엄마 모두 제가 맏아들 노릇을 못하고 있습니다.

저를 낳아주고 일찍 가신 엄마의 친정 제 외갓집이 지금은 수언시가 되었지만 1960년대 에는 경기도 화성군
태장면, 태안면 이던 지금의 영통지구 에서 가까운 동네 신2리, <벌터> 라는 논으로 둘러 쌓인 동네였습니다.
그곳에 우리집, 우리 엄마(일남 삼녀의 막내 딸) 네만 서울에 살았고 나머지 외삼촌 한분과 맏이인 큰이모,
그리고 둘째이모까지 세집이 벌터에 살아서 방학에 동생하구 가면 엄마를 일찍 일었다구 이모네, 외삼촌네서
너무 잘 해주시고 서울 아이들이라 얼굴이 하얗니 동네 형이나 누이들에게도 귀염을 받았습니다.

ㅡ 중 략 ㅡ

 

               - 2016. 3..6 "연희 나그네 " -

 

 

 

 

 

 

 

 

 

 

                                                                          D + 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