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ㅇ내 인생의 암흑기;

연희 나그네 2015. 11. 10. 06:20




오늘은 그 동안 망설이기는 했지만 언젠가 한 번은 내보이고 싶었던 제 이십대초에서 부터
서른 넷에 결혼을 할 때 가지의 어찌 보면 젊은 날의 황금기를 너무 허무하게 보낸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1972년 1월에 고교를 졸업(당시는 1월 중순에 졸업식을 했음)하고, 일곱살

입학을 해서 열아홉살이었는데 실업계고교를 다녀서(건축과) 고3 후반기부터 두달인가를
설계사무실(선배가 운영)에 실습을 나가고는 그 이후에 등교를 해야 하는데도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다 졸업식날에서야 학교를 갔더니 과장선생님이 졸업장을 주지를 않

고 너는 봄학기에 다시 나와서 시험을 한 번 더보고 졸업장을 받아라 해서 알겠습니다 하

고는 학교를 나왔지요. 졸업장이 나온걸 알고 있었으니요.(그 졸업장은 그 해 겨울에 예비고

사를 보려고 후배를 시켜 졸업증명서를 떼어 오라고 했더니 과장선생님이 이 학생이 서류를

떼러 오면 자기에게 보내라고 메모를 부쳐놓아서 할 수 없이 직접 가서 졸업장도 받아 오고

증명서도 떼어 왔음) 헌데 문제는 같은과 동기이고 한동네 살던 친구녀석이 일부러였는지 아

님 무슨 얘기 끝이었는지 우리 엄마께 그 얘기를 하는 바람에 들통이 났으니 새벽밥을 해서

학교를 보냈더니 맏아들이란 녀석이 졸업장도 못 받았다니 억장이 무너지셨겠지요. 그렇게

생각이 없는 녀석은 재수를 해서 중앙대 건축과를 나와 ROTC 장교로 5년을 복무했는데 그

것도 공병학교를 나온 뒤 병과를 항공으로 바꿔 경비행기를 조종하다 전역을 하였고 재학중

에는 산악부활동을 해서 지금도 산에를 다니는 걸로 아는데 집안이 너무 어려워서 책도

대로 사보지를 못하고 학교를 마친걸로 압니다만 그래도 대위로 전역을 한 후에 건설회사에
취직을 해서 다녔고 지금은 건축사면허를 가지고 건설현장 감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잘

만나지는 못합니다만, 제가 동창들 모임에를 나가지를 않거든요.
이야기가 잠깐 엇나갔는데 졸업하던 해 가을에 좀전에 얘기했던 친구와 다른 한명의 동창,

3명이 어울려 다녔는데 대학을 가겠다고 두명은 열심히 공부를 했고 저는 재학때와 마찬가

지로 공부도 하지를 않고 세 명이 예비고사를 봤으니 결과는 뻔 해서 두 친구만 합격을 했지

요. 해서 하나는 중대 건축과 다른 한명은 원래가 수원이 고향이라 아주공대 1회 입학을(73

학번,공경과)해서 졸업하고 취직을 했구요. 군대생활을 하고 취직을 한 후에 얼마동안은 만

나고 지냈는데 어느 시기부터 인가 멀어 져서 지금은 동창들을 통해 소식만 알정도이고 중대를

다닌 녀석은 고교재학시에 한동네에 살던 친구를 통해서 서로의 경조사에는 왕래를 하는 정도

입니다. 두 명은 그렇게 대학을 가고 저는 공부는 하지도 않고 대학은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

그 당시에 홍익대에 예비고사와는 무관하게갈 수가 있었던 건축미술학과가 있어 원서를(뻔

뻔했지요, ㅠ)받아다 엄마께 얘기를 했더니 기가막히셨는지 아무 얘기를 안하셔서 그냥 접

고 말았습니다. 헌데 진학을 안했으면 취업이라도 해야하는데 그 것도 안하고 그냥 허송세

월로 시간을 버리니 부모님께서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취직부탁을 하셔서 여기저기를 권해도

제가 알아서 한다고 다 마다하고 그냥 세월을 죽이다 어디 가서 잠깐씩 다닌 적도 겨우

셀 수 있을 정도였는데 지금생각해도 얼굴이 시뻘개질 정도의 삶이었습니다. 군대도 나이가

한 살 줄어 있고 입대도 10월에 해서 동창들과는 2년 이상차이가 났고, 1976.10.18~ 1979.
7.24 일부로 제대를 했는데 그냥 운으로 5사단 공병대대 군수과에서 행정병으로 있어서 훈련

도 제대로받아 보지를 않았고 사병으로는 이른 바 끝발 좋은 보직을 받아(사단 공병장비계,

장기하사관보직)편하게 생활을 하다 ㅈ제대를 했지요. 그 버릇은 제대를 하구도 이어져 서른

넷에 아무 것도 없이 결혼을 할 때까지 한심하게 보내서, 뭘해도 잠깐씩 하고 빈둥ㅂㄷ 했으

니 장남에 아버지께서도 편찮았는데 엄마가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지 지금생각해도 죄송스런

마음에 얼굴을 들지 못하겠고 1년여를 입원하신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만 납니다. 두 명의 남동

생에게 그 때의 저를 생각하면 형이라지만 사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결혼도

울 마눌이 아니었으면 엄두도 내지를 못했을텐데 당시 바보스런 생각을 했던 우리 마눌 덕에

빈 손으로 결혼을 했으니 저는 그렇다치고 우리 마눌이 한 고생은 말로는 표현이 어렵습니다. 결

혼 후의 이야기는 언제 다시 올려 보겠구요. 오늘은 어찌 보면 혹, 읽는 분들이 있으면 이런 사람

도 있구나 하시겠지요. 창피를 무릅쓰고 이 얘기를 올리는 이유는 지난 허송세월에 대한 뼈아픈
속죄의 성격입니다. 보시는 분들이 계시면 마음껏 흉을 보셔도 할 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일년을 병원에 계신 엄마, 그리고 누이들, 동생들에게 잘못을 빌어 봅니다.

(아들 녀석이 보고 아버지도 그랬는데, 하지 말기를 바라겠습니다)

- 2015.11.10 이른 아침에, 연희 나그네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