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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희동 일기(1,034)




오늘은 날도 흐리고 곧 비라도 내릴 듯하다. 오전에는 월별 세대 전기검침을 하는 날이라 내가 맡은 두 개동의 계량기를 위층부터 내려오며 일일이 보고 검침일지에 세대별로 적었다. 요즘은 수기로 적는 곳보다 검침입력 단말기에 입력을 하거나 폰에 앱을 깔아 입력을 하는 곳이 많지만 여기는 일일이 수기로 작성을 한다. 그나마 두꺼운 서류철에 전체동을 묶어 검침을 하지 않는 게 다행이지만 이왕 프린터에서 뽑아 주는 거면 보통의 경우처럼 꼭대기층부터 아래로 내려오고 계단식 같은 경우는 라인별로 뽑아야 검침하는 사람이 편한데 일층부터 꼭대기층으로 되어 있고 계단식도 일률적으로 작성을 해 두 번을 앞뒤로 왕복을 해야 한다. 그래서 22.12.27 업무시작을 하고 말일에 수도검침을 하면서 이렇게 해야 작성자가 편하다고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이번달 새로 만든 검침일지를 지난번과 똑같이 뽑아 내려 보냈길래 속으로 짜증이 나고 기전과장 자신도 기전주임 출신이라는데 어떻게 이 정도도 모르는지 이해도 안 되었다. 더군다나 노력을 해서 환갑나이에 기전과장을 하면 주임들 애로사항이나 업무적인 문제를 잘 알 텐데 어떻게 이렇게 업무를 보는지 더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소장께 기전주임 출신이라 그렇다는 얘기나 듣고. 아무리 내하고 좋은 사이가 아니라도 기전주임을 하다 노력해서 전기기사를 따 기전과장이 되었으면 앞으로 주임에서 과장할 사람을 생각해 더 잘해야 하는데 매일 주머니에 손이나 넣고 다니고 책상에 앉아 꼼짝도 안 하니 누가 봐도 좋게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오늘 오전에 내가 맡은 두동의 검침일지를 내가 다시 만들었다. 꼭대기층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작성하고 두 개 라인이 있는 동은 라인별로 따로 작성을 해 검침을 했는데 가만히 두고 보면 좋을걸 느닷없이 단체방에 삼월검침실시요함 하고 올려 나도 기분이 별로라 '검침하고 있음' 하고 댓글을 달았다. 아마도 동료주임에게서 검침은 안 나가고 대기실 상앞에 앉아 뭘 하고 있다는 전달을 받고 나를 보라고 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지 양식을 바꿔 검침을 끝내고 사무소에 제출을 하면서 소장께 얘기를 하니 그거 일률적으로 해야 할 텐데, 아니요 관계없어요. 그대로 입력하면 됩니다. 저도 입력도 해봤는데 한 사람 편하자고 검침하는 네 사람이 불편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했는데 소장께서는 내가 하는 게 잘못하는 건 아니지만 시끄러운 일이 발생해 골치가 아픈 모양이고 내게 늘 하는 얘기 잘난 사람 많으니 잘난 척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 오늘 저 잘난 척 안 합니다. 잘났으면 여기서 아무리 나이가 제일 많아도 이런 대우받겠어요? 했지만 실은 소장께 많이 고맙고 미안하다. 근무하는 날까지 열심히 해야지. 오후에는 기전실에 내려와 컴 앞에 앉아 다섯 시까지 꼼짝 안 하는 과장이라 지금 정문 경비실 구석에 앉아 폰으로 이렇게 올리고 있다.

-2023. 3. 15 흐렸지만 산수유도 목련도 꽃을 피운 봄날이다. "연희 나그네" -